[스크랩] 곤잘레스: 초대교회사(239- )
p.240. 이미 언급한 바처럼 투옥과 견뎌낸 이들은 "고백자"라고 불리웠으며 이들에 대한 교회의 존경은 각별하였다. 시프리안의 시대는 일부 고백자들이 교회 당국과의 의논도 없이 변절자들을 너무도 쉽게 용납하였다. 이제 콘스탄틴의 회심 이후에는 상당한 숫자의 고백자들이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여 교회당국의 시책보다 더 엄격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고백자들은 이교의 신들에게 제사드린 자들 뿐만 아니라 당국에 경전들을 넘겨 준 자들까지도 변절자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성경의 일점 일획을 고치는 것이 그토록 큰 죄라면 성경을 불태우고 파괴하도록 넘겨주는 죄는 더욱 크다는 것이 이들의 이론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에 의해 일부감독들과 교회지도자들은 "배반자"(traditores)라는 치욕적 칭호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곧 신앙을 배반하고 타협한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p.242.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이유, 분파의 직접적 원인은 과연 박해시에 신앙을 포기한 자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도나투스주의자들에 의하면 카이실리안(Caecilian)에게 안수했던 세 감독들 가운데 하나는 배반자 - 즉 성경을 관원들에게 넘겨준 인물이었다. 따라서 카이실리안의 성직 임명 자체가 무효라는 것이다. 카이실리안과 그의 지지자들은 우선 문제의 감독이 사실은 배반자가 아니었으며, 두번째로 만약 그가 배반자라 할지라도 그가 행한 카이실리안의 성직임명 자체는 계속 유효하다고 응답하였다. 따라서 이 문제의 감독이 과연 배반자인가 아닌가 하는 사실적 상황과 함께 과연 자격없는 감독에 의해 실시된 안수, 혹은 성직 임명이 유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다르게 된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행위의 유효성 여부는 이를 시행하는 감독의 자격과 가치에 달려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카이실리안과 그의 지도자들은 성례 및 이에 준한 행위들은 이를 실시하는 인간의 자격과 가치 여부에 좌우될 수 없다고 응답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경우 모든 기독교신자들은 과연 자기들의 세례와 성찬의 유효성에 대해서 마저 계속 회의와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례들을 집전하는 목회자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는 길이 없으므로 그 유효성에 관한 의심을 해소시킬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p.243.이러한 신학 논쟁 속에 가리워진 또 다른 갈등의 이유들이 있었음을 감지하게 된다. 즉 도나투스주의자들 가운데도 당국에 성경들을 넘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당국에 바치기 위하여 교회의식에 쓰이던 모든 물품들의 목록을 작성한 인물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도 도나투스파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 뿐 아니라, 도나투스파의 초기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인 펄푸리우스(Purpurius)는 자기의 두 조카를 살해한 자였다. 따라서 도나투스주의자들이 나머지 교회 일반에 갖게 된 적개심의 진정한 이유가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열심 때문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이러한 두 집단들이 사회적, 그리고 지리적 분계선을 따라 분리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카르타고와 그 인근지역 - 즉 총독령 아프리카 -에서는 카이실리안과 그의 지지자들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보다 서쪽의 누미디아(Numidia)와 모라타니아(Mauritania) 지방에서는 도나투스파들이 보다 우세하였다.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는 농경지대였다. 이들의 생산물 가운데 많은 양이 카르타고를 통해 이탈리아로 수출되었다. 그 결과 그 다지 노동력을 들이지도 않는 카르타고인들이 실제 농사를 지은 자들보다도 더 많은 이익을 취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는 카르타고 및 인근지역에 비하여 보다 덜 로마화되어 있었다. 로마화되지 않은 지역의 많은 주민들은 조상 전래의 언어와 전통들을 유지하고, 로마 및 이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외부로부터 침입해 온 세력으로 보았다. 반면 카르타고 시내에는 이미 상당히 라틴화된 계층의 지주들, 대상인들, 장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이야말로 로마와의 교역 및 접촉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는 계층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는 로마와 아울러 제국의 다른 지역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였다. 그런데 카르타고 및 그 인근 지역에도 누미디아인들과 모리타니아인들과 비슷한 감정을 가진 하층 계급들이 수없이 존재하였다.
콘스탄틴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기독교는 누미디아인들과 총독령 아프리카의 하층 계급 사이에 깊이 침투하고 있었으며 이보다는 못하지만, 모리타니아에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새신자들의 신앙은 제국마저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시에 보다 소수의 카르타고 내 로마화된 계층에 속한 인물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기독교공동체 내에도 사회 일반에서 볼 수 있었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개종한 인물들 - 특히 상류계층 출신 - 은 그들의 기존 사회적 접촉들을 단절하였으므로 교회내에서의 갈등과 긴장은 예상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등장과 아울러 교회가 평화를 누리게 됨에 따라 이 상황은 극변하였다. 그래서 훌륭한 로마시민인 동시에 충실한 기독교신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황제의 뒤를 따라 로마화된 계층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 이전에 이미 기독교로 개종하였던 상류층 인사들은 이 현상을 긍정적 발전으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내린 그들의 결단이 다른 중요한 중요한 인물들에 의해 옳은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하류층출신의 기독교신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사건의 전개를 교회가 부패해가는 과정으로 해석하였다. 이들이 항상 로마제국에 관해 증오하고 싫어했던 점들이 이제 교회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얼마 안되어 권력있는 계층 - 즉 정치와 경제를 통솔하는 자들 - 이 곧 교회까지도 지해하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 저항하는 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새로이 개종한 유력인사들이 아직도 이교신들을 섬기고 있을 때, 소위 무식하고 무지하였던 누미디아인들과 모리타니안인들은 이미 진리를 알고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당시의 갈등이 심화되어가는 모든 단계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이실리안은 로마화된 카르타고 기독교신자들의 지지를 받아 선출되었다. 반면 그의 선출은 총독령 아프리카의 하층계급들과 누미디아의 거의 모든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반대를 받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당시 발생한 문제들을 깊이 연구해 볼 여유도 없이 카이실리안의 당파가 합법적 교회를 대표한다고 결정하였다. 우선 라틴계 대도시들의 감독들이 이에 찬성하였으며, 결국 헬라계 도시들도 이에 합세하였다. 반면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박해 당시 유약한 모습을 보였던 누미디아의 성직자들의 지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는 물론 도나투스주의가 처음부터 의식적인 정치적 움직임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초기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제국이 아니라 '세상'에 대적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눈으로 볼 때 제국이 행하는 많은 행동들은 세속적이었다. 초기 도나투스파들은 카이실리안을 지지한 황제의 결정이 실수였다는 점을 설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세기의 후반 줄리앙의 재위시절까지도 일부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로마 지배자들의 실수를 깨닫고 자기들을 지지할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340년경 도나투스파들 가운데 '서쿰켈리온'(circumcellions)이라 불리우는 집단이 나타난다. 이 명칭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아마 순교자들의 유적지에 본부를 두었다는 데서 연유된 듯 하다. 이들은 폭력에 호소한 노미디아와 모리타니아 출신의 도나투스파 농부들로 구성되었다...이에 대응하여 로마당국 역시 폭력을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을 설복하고, 학살하고, 무력으로 점령하는 박해들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효고가 없었다. 써쿰켈리온들이야말로 당시 주민들 사이에 퍼져있던 깊은 불만의 표현이었으며, 제국은 이 움직임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바와 같이 이후 얼마 안되어 반달족(Vandals)들이 이 지역에 침입하여 로마의 통치를 종식시키게 된다. 그러나 반달족 아래서도 그 운동은 계속되었다. 6세기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동로마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써쿰켈리온인들은 계속되었다. 7세기 모슬렘 정복 후에야 비로소 도나투스주의와 써쿰켈리온들이 사라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도나투스주의 운동 -특히 그 극단적인 모습인 써쿰켈리온들-은 콘스탄틴의 개종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상황들에 대항한 반응이었다. 일부 기독교신자들이 새로운 질서를 환영한 반면, 다른 이들은 사막으로 도피해 갔으며,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제 제국의 동지로 변한 교회의 존재를 거부해 버린 것이다. 이들이 교회본질과 성례의 유효성에 관해 던진 심각한 신학적 난제들은 다른 기독교신자들, 특히 성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깊이 씨름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p.250.그러나 콘스탄틴 개종 이후 사태가 변화하였다. 이제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권위를 동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제국은 콘스탄틴이 제국을 결속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하기를 소망하였던 교회의 통일에 큰 관심을 자기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는 곧 권력을 사용하여 기독교신자들에게 신학적 문제에 동의하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이런 과정 속에서 분쇄된 신학 이론들 속에는 기독교메세지의 핵심을 위협할 만한 내용들도 있었다. 만약 제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문제들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오랜 논쟁에 걸쳐 결국은 합의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통치자들은 교회 안에서 이처럼 지루한 논쟁이 계속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황제의 권위에 의해 옳은 자를 가려내고 틀렸다고 생각되는 인사들을 침묵시키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논쟁에 관련된 많은 인사들은 그들의 대적들이나 교회를 설복하고 확신시키기보다는 황제들을 설복하고자 하였다. 결국 신학적 논쟁들이 정치적 음모의 침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p.251-2.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기록과 불변이고 고정적인 지존의 존재라는 고전적 개념을 조화시키기 위해 두가지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이들은 곧 성경구절들의 풍유적인 해석과 로고스의 교리였다. 이 중 풍유적 해석은 매우 쉽게 적용할 수 있었다.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 무언가 '가치없는 방법으로' 표현할 때마다 - 즉 지존의 존재가 가진 완전성에 걸맞지 않은 표현이 나타날 때마다- 이러한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만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정원을 거니셨다던가 혹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할 때에 신자들은 불변의 존재는 실상 걷거나 말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지적으로만 본다면 이는 많은 지성인들을 만족시켰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미흡한 바가 있었다. 왜냐하면 교회생활은 인격적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신앙 위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그려낸 지존의 존재는 결코 인격적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지존의 존재에 관한 철학적 개념과 성경의 증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해결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으니, 이는 곧 저스틴,클레멘트, 오리겐 등에 의해 발전된 로고스의 교리이다.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비록 지존의 존재 - 성부 - 가 불변이요, 고정적인 것은 틀림없으나 동시에 세상 및 인간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 존재, 즉 로고스, 말씀 - 혹은 하나님의 이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라서 저스틴에 의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고 할 때 그 진정한 의미는 곧 하나님의 로고스가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p.255.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의 지방신학 논쟁이 전체 동방교회를 분열시킬 위협을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킨 직후 콘스탄틴이 중재에 나섰을 때의 상황이었다. 그는 우선 종교문제에 관한 그의 고문이었던 코르도바의 감독 호시우스를 파견하여 양파의 화해를 꾀하였다. 양자간의 갈등은 결코 중재로 해결될 수 없다고 호시우스가 보고하자, 콘스탄틴은 그가 한 동안 생각해 왔던 방책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이리하여 제국 전역으로부터 기독교회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대종교회의를 열게 되었다. 당시 선명하게 기준이 되는 정책들을 필요로 하였던 몇가지 문제들과 아울러 이 대회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논쟁을 해결해야만 했다.